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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_이야기(44)] 이규태 이야기

이정환 기자 승인 2018.05.11 11:26 의견 0
백열 형에게서 규태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네 규태 형이 죽어요 무슨 일이에요”

 

“뇌가 스폰지처럼 녹는 병에 걸렸는데 평소에 꿈꿨던 세계일주를 갔다가 카이로에서 죽었다.”

 

규태 형과 제일 친했던 백열 형이 담담하게 대답한다. 친구들이 카이로까지 가서 시신을 수습해서 왔고 얼마 전 장례를 치뤘다고 한다.

 

숭곡초등학교 총동문회는 미아삼거리를 에워싼 하월곡동, 미아동, 장위동, 길음동 등 네 개 동의 향우회와 같다. 숭곡초등학교는 숭인초등학교가 너무 비대해져서 반으로 나눈 것으로 미아삼거리에 있다. 동문의 대부분은 그 곳에서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까지 살고 있거나 본가가 아직 이 동네다. 한마디로 동네 형 누나 친구 동생들의 모임인 셈이다.

 

나는 당시에 총동문회의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어서 웬만한 동문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선후배들과 막역하게 지냈다.

 

숭곡초등학교 총동문회가 결성된 지 4~5년이 지난 어느 날 규태 형이 동문회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날은 규태 형의 동기들인 숭곡초등학교 2회졸업 동기들이 동네 감자탕 가게에서 번개모임을 갖는 날이었다. 누구에게 연락을 받았는지 모임 중간쯤에 규태 형이 “여기가 숭곡모임이에요”라며 나타났다. 진한 턱수염과 진한 구레나룻에 헝클어진 덥수룩한 장발의 머리는 마치 소도둑이나 산적을 연상하게 했다.

 

“아 누구십니까” 아마 백열 형이 먼저 아는 체를 했을 거다.

 

“나 숭곡초등학교 졸업생이오. 오늘 2회들이 모인다는 얘길 듣고 왔는데……”

 

규태 형은 초등학교 졸업 후 동기들과 전혀 교류가 없었는지 학창시절을 기억해 내는 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처음 동기모임에 나왔지만 규태 형의 거침없는 성격 때문에 금방 동기들과 친해졌다. 그 후 동기모임에 재미를 붙인 규태 형 덕분에 2회 졸업생들은 미아삼거리에서 수시로 모임을 가졌다.

 

늦깎이로 총동문회 활동을 시작한 규태 형이지만 동문회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정환씨 우리 미아삼거리에 동문들 사랑방 하나 만들까 정환씨가 요리도 잘 만드니까 딴 데서 쓸데없이 돈 쓰지 말고 수시로 모이는 공간을 하나 만들자고” 결국 형은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공간 하나를 마련했다. 하지만 1년 후 공간은 폐쇄됐다. 한참 후에 안 사실인데 그때 형이 운영하던 회사의 창고가 화재로 전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형은 힘든 내색조차 하질 않았다.

 

내 앞엔 얼마 전 뇌가 녹는 병으로 사망한 규태형이 앉아있고, 내 옆에는 부산에 사는 인환형이 앉았다. 이 자리는 백열형의 생일이라고 생긴 번개모임이다.

(사진 : 이정환)

 

선후배, 동기들 사이에서 인망이 높은 형은 총동문회 회장을 맡게 됐다.

 

형은 술이 생각나면 “정환씨 뭐해 미아리로 갈까”라는 간단한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는 어디라고 정할 필요도 없이 욕쟁이 탱자씨네 실내포차에서 만났다. 주요 멤버는 성인용품점을 하던 백열형, 2년 선배 조숙자, 전임 총동문회장인 심숙향 등이었다.

 

“이봐 탱자씨, 여기 오늘 최고로 맛있고 좋은 걸로 안주 좀 줘봐.” 마초처럼 주문을 하면 탱자씨는 “아 씨벌 나이도 한참 어린 동생이 말을 띄엄띄엄 하네. 자지(백열 형을 그렇게 불렀다) 친구라 싸가지가 없구먼”이라며 웃으며 되받아 쳤다. 형은 말을 아무리 험하게 해도 왠지 밉지가 않았다.상남자 스타일인 규태 형은 말은 거칠지만 악의가 전혀 없고 속정이 깊은 사내였다.

 

어느 날 문자가 왔다. ‘정환씨 교통사고가 났어. 나 지금 병원이야. 갈빗대가 4대 부러졌대.’ 소식을 듣고 놀라 동문 몇 명과 병원엘 갔더니 “굴찜이 좋은 계절이잖아. 나가자.”며 병원밖을 나섰다. 갈비 넉 대가 부러진 사람이 병원을 빠져나와 술을 마시고 병원에 다시 들어갈 정도로 그는 술을 좋아했다.

 

몇몇 동문들과의 불화로 초등학교동문회에 몇 년간 참석하지 않았다. 그래도 동문모임은 늘 미아리에서 열렸기에 오가다 규태 형과 함께 하는 일행들하고 마주쳤다. 가끔은 자리에 참석하기도 하고 불편한 동문이 섞여있을 땐 그냥 지나치기도 했다.

 

"정환씨 이제 동문회에 다시 나와야 하지 않겠어" 규태 형이 조심스럽게 하지만 약간 명령조로 말을 꺼낸다.

 

"형, 아직요. 좀 더 있다가 나갈게요."

 

"이번 총동문 체육대회에 꼭 나오길 바라. 그리고 명환이도 같이 나오면 좋겠어." 내 둘째 동생도 동문이자 3년 후배이다. 그날이 규태 형과 마지막 대화를 나눈 거 같다.

 

“네 규태 형이 죽어요 무슨 일이에요”

 

규태 형이 죽었다는 얘길 백열 형에게 들었다.

 

“뇌가 스폰지처럼 녹는 병에 걸렸는데 평소에 꿈꿨던 세계일주를 갔다가 카이로에서 죽었다.”

 

규태 형과 제일 친했던 백열 형이 담담하게 대답한다. 친구들이 카이로까지 가서 시신을 수습해서 왔고 얼마 전 장례를 치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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