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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60주년(8)] 정통성과 정당성으로 돌아보는 민주주의(上)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0.06.07 23:57 | 최종 수정 2020.06.08 00:58 의견 0

2020년으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하 ‘5·18’)은 40주년을 맞이했다. 그러나 ‘5·18’은 여전히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중이다. 근래에도 당시 최고 명령권자였던 전 전두환 대통령이 법정에 세워 사실 여부를 심문했으며,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은 국립 5·18묘지에 참회의 무릎을 꿇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보수진영의 미래통합당은 ‘5·18’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가 원내대표가 바로 사과하는 해프닝을 펼쳤고, 진보진영에서는 ‘5·18’을 더 진중하게 살피고 기려야 한다고 선언한다. 국가를 수호하고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국군의 총구가 국민을 향했던 있을 수 없는 사건은 두 번 다시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보수가 ‘5·18’ 왜곡하는 만큼 진보의 확대해석도 경계해야 한다. 둘 다 진실로부터 멀어진다는 의미에서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진상규명을 철저히 하고 역사를 바로잡는 건 진실을 밝히자는 것이지 왜곡하고 확대 해석하자는 것이 아니다.

왜곡과 확대해석은 ‘5·18’만의 것이 아니다. ‘4·19’와 몇 년 전에 있었던 ‘촛불 시위’도 다르지 않다. 모두 정치적 성향과 기호에 따라 왜곡과 해석 확대가 가능하다. 특히 진실규명보다는 반대를 위한 왜곡과 해석의 경합에서 더욱 번져 간다.

◇정치적 정통성과 사회적 정당성

‘정치적 정통성’은 직접선거와 같은 합법적인 민주주의 절차를 말한다. ‘사회적 정당성’은 사회의 다양한 활동과 의견을 존중하는 동시에 다중 주체들의 지지를 의미한다.

전자는 비교적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으나, 후자는 진영의 논리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박정희 정권의 평가는 보수와 진보가 항상 다르다. 이야기를 단축시키기 위해 결론만 말하자면 보수가 애써 가져온 경제적 논리로 민주주의를 훼손할 수 없으며, 그로 말미암아 파생하는 사회적 정당성의 부족을 상쇄할 수도 없다.

이에 ‘5·18’ 40주년을 기념해서 대한민국의 각 정권을 회고하고 평가하는 작업 또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데 작은 초침 역할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단, 각 정권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평가할 때 시공간적인 기준은 지도자(대통령)임을 미리 밝혀둔다. 4·19와 관련해서 본다면 이승만 정권이 초기는 정치적 정통성과 사회적 정당성을 어느 정도 인정받았지만, 말미에는 정통성과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런 경우 초기, 중기, 말기 등 그 시기를 다양하게 나눠 분석해볼 필요도 있지만, 본문에서는 명확한 구분을 위해서 시작과 끝만 다루고자 한다.

◇이승만 정권

이승만이 ‘국부’로 불리기 원했고, 실제로 유능한 정치인이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공과(功過)를 따질 때 공이 더 크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모든 공적을 상쇄할 만큼의 실정과 폭정이었다.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의 위상은 당연히 돋보였다. 한반도 전체를 통틀어서 지도자 순위를 매기면 1위가 이승만이었다. 북한 김일성은 5위 권 밖에 머물렀고, 김구 선생조차도 인지도 면에서 이승만을 넘어서기 어려웠다.

배화학당 시절부터 정치하러 다닌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정치적 야망이 크고 지도자의 기질을 발휘한 이승만은 다른 지도자들과 비교할 때 초대 대통령으로 준비된 지도자 이미지가 굳혀졌다.

따라서 최초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정치적 정통성을 확립할 수 있었고, 사회적 성숙이 미흡한 상황이었으나 당시 수준을 고려하면 이승만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절대적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의 말미는 부정선거와 독재였다. 그는 치정 기간을 늘리기 위해서 선거법을 개정했으며, 본인에 한정해 영구집권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려 했다. 그 결과는 4·19혁명으로 인한 하야였다.

이때는 정치적 정통성과 사회적 정당성 모두 상실된 상태였다. 불법 선거, 헌법 유린, 그리고 민중의 봉기 등을 고려할 때 정통성, 정당성 모두 잃었다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현재도 이승만 평가의 야박함을 두고 보수진영에서는 위대한 인물 이승만을 새롭게 등장시키고 선전하려 노력하고 있다.

분명 이승만 개인의 능력은 탁월하고 뛰어났다. 그러나 ‘위대함’이라는 접두어를 사용할 정도는 아니다. 그가 그렇게 위대했다면 불법 선거, 헌법 유린 등과 같은 실정과 불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짧았던 2공화국

2년을 채우지 못한 정권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의원 내각제였지만, 온전한 권력이 없었기에 혼란만 가득한 시기였다. 군사쿠데타가 발발하자 “올 것이 왔다”라고 했다는 당시 최고 권력자 장면 총리의 말이 모든 걸 대신한다. 이 시기는 처음만 있지, 끝은 없다.

합법적인 선거 절차를 통해 정권이 수립돼 정치적 정통성은 확보했으나, 사회적 정당성은 얻지 못했다. 사회가 안정되지 못했고, 이를 통제하고 치리(治理)할 수 있는 권력이 없었다. 존재했던 권력도 국민으로부터 적극적으로 지지받지 못했다.

강력한 권력이 사라지고 난 후, 발생한 힘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능력이 당시 지도자들에게는 없었다. 물론, 짧은 정권 기간이었기에 평가가 어려울 수 있지만, 당시에도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권력투쟁을 일삼았다. 다양한 계획이 있었다고 하지만 계획을 구상하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냐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박정희 정권

박정희 숭배자, 향수자들은 ‘5·16 군사정변’을 ‘혁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혁명이라고 발언하는 사람을 실제 현실에서 보기 힘들다. 박정희 시절 경제적인 발전으로 보릿고개를 극복하게 해줬지만, 존 스튜어트 밀의 “배부른 돼지가 되느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라는 말처럼 인간은 먹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동물이 아니었다.

경제적 발전만으로 그의 불법적인 쿠데타를 정당화할 수 없으며, 민정이양기를 거쳤다 하지만 불법으로 선거를 치러 대통령에 당선됐다. 또한 중앙정보부와 같은 비밀 감시 기관을 만들어 국민의 자유를 억압했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의 시작은 정치적 정통성과 사회적 정당성 모두 존재하지 않았다. 후에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맞붙은 윤보선을 경제적 발전을 토대로 여유 있게 따돌리며 사회적 지지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도 불법 선거가 자행됐으며, 압도적인 물리력을 동원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부하의 저격으로 18년간의 박정희 정권은 마무리된다. 박정히 정권은 정통성과 정당성 모두에서 박하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유신’이라는 헌정사상 최악의 헌법으로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등을 1인 치하에 옭아맨 시기였다.

◇논란의 4공화국

대통령이 부재해서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나, 12·12사태로 원활한 통치가 어려웠다. 당시를 평가할 수 있는 특별한 기준도 찾기 힘들다. 굳이 정치적 정통성을 따진다면, 박정희 정권의 승계 구도이기에 정통성이 존재하지 않았고 사회적 정당성 역시 부재했다.

◇전두환 정권

아직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살아있기에 ‘5·18’이 40년이 지났음에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12·12사태 자체가 불법이었으며, 이후 문민정부에서 핵심 주모자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무기징역과 20년 이상의 형을 선고하여 불법임을 선언했다.

과거에는 백담사 은거, 이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단식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기도 했다. 최근에도 전 전 대통령은 법정에 서서 스스로를 변명했다.

7년 담임제와 간선제로 대통령을 꿰찬 정권이니 당연히 정치적 정통성과 사회적 정당성은 바랄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더 욕심내지 않고 7년의 임기만 마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점은 나름의 탁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태우 정권

1987년 그가 했던 ‘6·29’선언로 헌법이 개정된다. 국민의 대표를 국민이 직접 선출할 수 있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태우 정권에 정치적 정통성을 줄 수는 없다. 여전히 당시 여권의 대표였던 노태우는 당선을 위해서 지역감정을 의도적으로 활용했고(단, 선거는 이겨야 하는 경합이니 무조건 비판만 할 수는 없다), 금권선거를 자행했다. 당시 통장들이 가가호호(家家戶戶)를 돌면서 현금을 돌린 건 명백한 부정선거이다.

사회적 정당성도 확보하기 힘들었다. 끊임없이 데모가 있었고, 여전히 군부 출신의 대통령이자, 불법 쿠데타의 핵심 인물이었기에 정당성은 찾을 수 없다. 그 시절 서울 올림픽을 성공리에 치르고 북방외교의 첫 단추를 채웠지만, 노태우 정권은 태생적으로 정통성과 정당성을 가질 수 없는 정권이었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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