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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읽기(22)] “친애하는 삶에게”

노벨문학상 그대로 읽기 <디어 라이프> ①편 - 엘리스 먼로 (2013년 수상자)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0.09.14 15:45 의견 0

◇‘행복한 그림자’에서 미완의 ‘디어 라이프’로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작가의 초기 작품들이다. 그리고 <디어 라이프>는 말기 작품이다. 전자는 20세기 중반을 배경으로 하고, 후자는 21세기로 넘어온다. 약 40년 정도의 차이다.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작가의 색채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은 작품에 작가의 지문을 남긴다. 그래서 읽다 보면, 누구 작품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한 작가의 작품을 찾아서 읽다 보면, 익숙한 작품의 숨결에 평안하게 책장을 넘길 수도 있지만, 조금 지루하기도 하다.

40년이 지났다.분명 세상이 달라졌다. ‘행복한 그림자 춤’을 추던 주인공들은 ‘행복한 춤’을 추게 됐을까? 그녀(먼로)의 사람들(여자 주인공들)은 존중받고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존중해 달라고 요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아버지에게 거침없이 이야기했고 그것은 흔한 일이었다. 오빠들은, 심지어 여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이슬람 교도가 되겠다는 오빠마저도 어머니의 말을 들을 때면 늘 동등한 권위를 가진 사람으로 어머니를 대했다.  <안식처> 중

‘여자여서’라는 표현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로테스크한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여자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이를테면 페미니즘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당시에는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쓰지도 않았다는 것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 야망을 갖는 것은 차치하고, 진지한 생각을 하는 것, 심지어 책다운 책을 읽는 것조차 자녀가 폐렴에 걸린 이유로 의심을 살 수 있었다고, 회사 파티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면 남편의 승진에 지장을 줄 수 있었다고, 이 모든 걸 열심히 설명해야 할 것이다. 어느 정당을 지지하는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여자가 떠든다는 것이었다.  <일본에 가 닿기를> 중

쉽게 모든 게 바뀔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도 세상을 그림자로 살아가야 했던 과거에서 이제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살아가는 ‘삶’으로 어느 정도는 전환한 듯하다. 문제 제기가 한창이었던 시기(1960년대 이후)를 지나서 이제는 해결 방법으로 세상에 맞서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물론, 작가의 글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이지는 않다. 다만, 일상 속에서 달라진 여성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균형을 맞춰 가는 세상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주인공들의 생활은 보수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문란하기까지 하다. 딸을 두고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정사(情事)를 나누기도 하고, 불륜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해방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용기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듯하다. 물론, 가부장적인 시각에서는 불륜이다.

간통과 술꾼과 스캔들—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 어린 아가씨도 자라서 다른 여자들처럼 멋을 부리는 여자, 매력 있는 여자가 되었을 뿐이다. <메이벌리를 떠나며> 중

<디어 라이프> 표지  (예스24 제공)

◇올라가면 내려가는 게 있다

한 작가의 초기 작품과 말기 작품을 동시에 읽으면, 작가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먼로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주제와 소재를 바꾸지 않았다. 소재는 일상이고, 주제는 여성의 삶이다. 물론, 여성의 태도와 행동은 달라졌다.

이전의 삶과 연관된 모든 것, 옛집과 그 길—그 남편—과 연관된 모든 것에서 벗어난 것이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자갈> 중

결혼이 여성의 삶에 중심이었던 과거에서 이제는 그 제도에서 벗어난 것이 ‘행복’이라고 표현한다. 이것만으로도 세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을 정도다.

‘그림자’는 ‘삶’이 됐다. 이전까지 여성들에게 삶이 없었다는 작품들-<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어느 순간 세상에 맞서고, 고개를 당당히 들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왔다.

요즘은 여자든 남자든 모자는 쓰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았다.  <코리> 중

여성의 지위가 향상된 것에 반비례해 남성의 위상은 떨어졌다. 세상의 지배자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잘못은 저지르지 않는 철인이라도 된 듯이 설쳐댔던 남성은 없다. 이제 무능한 남성이 등장하기도 하고, 교활한 남성이 나오기도 한다. 절대적인 가부장적인 위상이 한순간에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그런 남성을 일부러 찾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묘사한다.

◇움직이는 추

작가는 현미경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 작가가 가져야 할 당연한 덕목일까? 현실을 추상적으로 읽지 않는다. 그녀는 스케치가 아니라 정밀 묘사 수준으로 세상을 본다. 단, 정밀 묘사를 할 수 있는 현미경 같은 눈으로는 전체 세상을 볼 수 없다.

미술 시간을 떠올려 보자. 탁자 위에 올려진 꽃바구니를 묘사하도록 하지, 절대로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을 묘사하는 경우는 없다.

여성의 시각에서 세상의 무게 중심이 제자리를 찾아간다고 생각할 거 같다. 그래서 그녀들은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동반자로 살아가는 화목한 현실은 아니다.

“내가 어떤 치들을 말하는지 알지? 그치들은 거짓말쟁이야. 말똥 같은 인간들. 죄다 고상해 보이고 싶어하지. 하긴 고상해 보이고 싶어하는 아내들의 말을 따랐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네가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이건 꼭 기억해둬라. 알겠니?”  <안식처> 중

화해 없이 억지로 움직이는 추로 무게 중심을 맞추는 것은 어렵다. 언제라도 추는 다른 쪽으로 움직일 수 있다. 결국에는 균형을 맞추리라 생각하지만, 그 과정이 쉽지 않다. 분명 ‘좁은 문’(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지나 넓은 길로 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 마음에는 죄책감이 가득하다.

우리가 그만 멈춰야 한다는 신호. 그의 목소리에서, 그리고 그의 얼굴에서 그런 것이 느껴졌다고 그녀는 확신했다. 죄에 대한 그 모든 케케묵은 논의. 죄악. <코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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