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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잔(11)] 토마스 만(Thomas Mann)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 숙명적 몰락을 바꿀 수 있는 힘은 혁명뿐이다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3.04.26 17:38 | 최종 수정 2023.04.26 17:45 의견 0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고도 한다. 시대적 변화에 나름대로 대처하면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간 한 가문이 결국에는 몰락하는 모습을 애절하게 서술하고 있다. 어쩌면 작가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흥망의 곡선을 그리는 한 가문의 모습을 통해, 세상의 모든 인간, 사회, 국가의 발전과 절정에는 한계가 있으며 이후에는 몰락의 길만 남았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부덴브로크 가는 사업가 집안이자,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유지라고 할 만큼 잘 알려진 가문이다. 재산은 적지 않으나 재벌이라고 할 만큼 큰 부자는 아니었고, 정치적으로도 시의원까지 배출했지만 시장까지 기대할 수준은 아니다. 조금 철 지난 표현으로 설명하자면 2% 부족한 가문이었다.

작품에는 총 4대가 등장하는데 “회사와 가정은 절정기를 맞이했고, 우리의 신용과 명성은 최고의 상태에 있습니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1대 때 가문의 최 절정기에 도달한 상태였다. 이후 아들 대에 이르면서 사회 분위기가 바뀐다. 혁명이 일어나고 계급 평등을 주장하는 사상이 유럽을 덮친다. 이때 부르덴브로크 가의 영사는 계급의 위계가 무너지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에 자신의 계급을 옹호하면서 지역의 봉기를 잠재우고 그의 명성을 높인다.

그러나 영사의 삼 남매 중 딸이 결혼에서 실패하고, 둘째 아들이 좀처럼 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면서 부르덴브로크 가의 위상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다만, 첫째 아들 토마스가 가업을 이어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므로 영사는 그에게 가업을 맡기고 운명한다. 가업을 이어 받은 토마스는 가문의 명예와 번영을 위해 애썼고, 가문에서는 처음으로 시의원에 당선돼 시장의 신임을 받는 위치에 오른다. 정치적으로 최 절정기에 도달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한가문의 몰락을 막기에는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부족했는지, 여동생은 다시 한 번 결혼에 실패하고 그녀의 딸도 결혼에 실패한다. 아울러 남동생은 정신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좋지 않은 상태가 되고, 가문의 명예와 어울리지 않는 길을 택한다. 이후 사업도 조금씩 위축되고, 인간관계, 정치 등에서 받는 스트레스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3번 째 남자 토마스는 치과 치료 이후 길바닥에 쓰러지고 그 후유증으로 삶을 마감한다.

남은 자는 토마스의 병약한 아들인데 태생적으로 심신이 건강하지 못했고,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얼마 후 병으로 길지 않은 삶을 마감한다. 대를 이을 부르덴브로크 가의 남자가 사망한 이후 가문은 뿔뿔이 흩어져 제 살길을 찾아 떠나면서 작품은 끝을 맺는다.


◆영원한 번영은 없다

작품은 ‘번영의 신기루’를 지적하고 있다. 절정에 도달한 한 가문의 몰락 이야기를 통해 인간, 사회, 국가 모든 생명체나 조직의 귀결은 ‘죽음’이라고 말한다. “이제 죽음이 그 모두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시공, 그러니까 역사라는 기만적인 인식 형식, 후손 속에서 영광스럽고도 역사적으로 존속하겠다는 우려 섞인 생각, 얼마 안 가 결국 역사적으로 해체되고 분해될 것”

인간은 절정 위에서 그 아래를 내려다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분명히 보여줬다. 절정 이후에는 무조건 내리막길이 있었음을, 그것도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말이다. 역사적으로 가장 찬란했던 제국이었던 로마를 생각해 보자. 여전히 문화적 영향력은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제국이다.

그 보다 멀지 않은 과거에는 영국이 있었다.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고 할 정도로 번영을 누렸으나, 이제는 과거 제국의 영광을 뒤로한 채 철저히 고립된 섬으로 남으로 한다. 이후 미국과 소련은 어떠한가? 후자는 사라졌고, 미국의 위상도 과거와 같지 않다. 가깝고 먼 일본은 어떤가? 수치적으로 대한민국의 3배 이상의 GDP를 자랑할 때가 있었는데, 현재는 오십보백보 수준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 이러한 순리를 그대로 적용한다. 숙명이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다. 마치 그리스 비극의 주제를 떠오르게 한다. 정해진 운명을 극복하려고 노력한 인간, 그러나 결론은 운명대로 비극을 맞이한다. 오이디프스의 저주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절정기에 이른 상태를 물려받은 아들, 그리고 그 손자 모두 가업을 충분히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인물들이었으나, 가문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그러나 굴곡의 크기가 다를 뿐, 침체, 몰락, 소멸로 이어지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모든 요소가 최적화를 이룬 상태에서 맞이한 발전과 번영, 그리고 절정은 곧 최적화 상태가 조금씩 흐트러지면서부터는 내리막길로 향할 수밖에 없다. 번영이 영원할 거로 생각하는 것은 곧 인간의 교만이자 신기루를 신봉하는 것과 다름없다.

◆작품은 숙명론을 따른다

여기서 조금 더 작가의 숙명론을 생각해 보자. 죽음으로 종결되는 작품의 최후의 주제는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멸을 부정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혹은 진실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작가는 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만 했을까?

작품이 나온 시기는 20세기 초다. 최초 발행일이 1901년이라고 하니, 유럽이 절대적 강자로 세상을 지배했던 시점에서 조금씩 뒷걸음질 치고 있었던 시기였다. 아울러, 내부적인 분열이 있어서 혁명의 진통을 겪어야 했다. 마르크스주의가 한 참 전에 등장했고, 다윈의 진화론(종의 기원이 1859년에 출간됐다)이 등장했다. 앞으로만 나아갈 것 같았던 진보에 제동이 걸린 시기가 19세기 중반 이후였다.

‘에릭 홉스봄’의 역사적 구분으로 따르자면, “혁명의 시대”를 지나 “자본의 시대”와 “제국의 시대”의 중간에 놓여 있었던 시기였다. 알다시피, 제국의 시대는 절대 몰락의 수렁, 양차대전이 있었던 시기다. 이렇게 보면 작품 속 한 가문의 몰락은 유럽의 몰락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왜 ‘진보’, ‘개척’이라는 언어 대신 작가는 ‘죽음’과 ‘숙명’을 택했던 것일까? 결국, 번영 뒤에는 반드시 몰락이 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숙명론에 힘을 실은 게 아닐까?

◆우리(대한민국 정치)의 절정기는 지난 것일까?

2022년 대한민국 1인 GDP를 보니, 3만 달러가 넘는다. 내가 25년 전에 대학교를 다닐 때, 일본가 격차가 20년 이상이 난다고 했는데, 현재 격차는 800달러 밖에 나지 않는다. 부동산이 붕괴되고, 사회가 늙어가고, 여러 가지 사회적 병폐가 닮거나 닮아가고 있는 데 명목상 1인당 GDP 수준도 비슷하다.

정치적으로도 아시아권에서 완전한 민주주의 수준에 도달한 국가에 한국과 일본이 포함돼 있다. 20~30년 격차가 25년이 지난 현재도 거의 비슷한 수준이니 우리는 절정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아시아 최고의 선진국이라고 자타 공인하는 일본과 대등한 수준이니 절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그렇다면, 안타깝게도 이제 남은 길은 내리막이다. 경제 성장도 한계를 보인 지 오래됐고, 1987년 이후 개정된 헌법 이후 정치적 변화에 맞는 개정이 필요했음에도 여야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답보하고 있는 상태다. 적어도 정치는 후퇴하고 있는 게 맞다.

대통령을 탄핵 시킨 미증유의 사건은 국민의 정치적 신장이었다고 생각한다. 즉, 절정기였다. 정치적 절정은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겠으나, 1987년 헌법 개정 이후 정치권력이 바뀐 1997년까지로 볼 수 있다. 새로운 정치권력이 등장했다는 것은 정치적 경쟁과 상보를 통해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후 정치는 조금씩 몰락한다. 정치적 세력이 크지 않았던 대통령은 퇴임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고인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개인적으로는 망자에 대한 이야기로 정쟁하는 것은 여러 모로 부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죽은 사람을 현실 정치에 끌고 들어와 이슈화 하는, 과거에 얽매이는 정치가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이후 경제를 외쳤던 대통령은(경제 성장 7%를 주장했으나, 불가능한 수치였다) 경제 성장에 실패했고, 정치적으로도 원활하지 않았다. 그리고 등장한 독재자의 후광을 입어 등장한 최초 여성 대통령의 말로는 탄핵이었다. 그리고 새롭게 뽑힌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앞세워 복수혈전은 잘 치렀으나, 그 이상의 결과물은 없었다.

현재는 어떤가? 앞으로 4년이 남았으니, 결과는 모른다. 다만 예상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 정치가 절정을 지난 게 확실하다면, 4년 후 평가는 더 암울할 것이다. 물론, 반등이 조금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향하는 운명을 다시 절정으로 끌어 올릴만한 힘은 현 체제에서 만들어 내기 어려울 것이다.

심신이 심약했던 부르덴브로크 가의 마지막 남자 ‘하노’의 절규를 보자. “난 죽고 싶어, 카이! 아니야, 난 아무 쓸모없어. 난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 난 이름을 떨치고 싶은 생각조차도 없어. 마치 부당한 일이라도 되듯이 그게 두려워! 나한테서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해. 최근에 견진 성사를 하고 나서 프링스하임 목사가 누구한테 말하기를 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거야. 난 망하는 가문에서 태어났대.”

그렇다면, 답은 뭘까? 체제 전복, 즉 혁명밖에 없다. 그런데, 혁명은 항상 유혈이 낭자했는데, 현재 분위기를 보면 피가 사방에 튀어도 역겨워할 사람은 없을 듯하다. 천인공노할 많은 사건들이 우리 뇌에 예방 주사를 수도 없이 놔 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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