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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잔(17)] 게르하르트 하웁트만(Gerhart Johann Robert Hauptmann) 『길쌈쟁이들』

- 기독교의 정치화는 곧 개독화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3.07.05 17:30 | 최종 수정 2023.07.05 17:32 의견 0

세상은 넓고 참 모르는 작가가 많다.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은 처음 듣고, 처음 읽는 작가이다. 그는 무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며, 독일 대통령 후보로 거명된 유명인이기도 했다. 이런 편견(작가의 정치적 경력)을 떨치고 읽더라도 『길쌈쟁이들』은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희곡으로 읽히는데, 정작 작가는 그런 정치적 편견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작가가 작품을 출간한 이후의 모든 판단은 작가가 아닌, 독자의 몫이니 정치적 메시지를 생각하며 읽든, 그렇지 않든 작가가 관여할 일은 아닌 듯하다.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은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일반 학교에 진학하지 않았고, 실업계 학교에 진학해 생업에 종사한 이력이 있다. 많은 유명한 작가들이 그렇듯 다양한 경험은 분명히 글을 쓰는 데 좋은 영향력을 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작품은 길쌈쟁이들이 열심히 짜서 가져 온 직물에 대한 평가를 받고, 돈을 받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시대는 산업혁명이 독일에까지 이른 시점이다. 과거에는 적정한 가치를 인정받았던 길쌈쟁이들의 결과물들이 어느 순간 가치폄하 당하면서 도저히 생활할 수 없는 대가를 지급받게 된 수준에 이르렀다. 그들은 울분을 가지고 있었고, 언제라도 폭발 준비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자본주의자들은 공권력과 권력자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성직자로부터도 정신적 지지를 받고 있어서, 자본가가 누릴 수 있는 부와 이로 인한 편리성은 신의 타당한 은총으로 정당화되고 있었다.

수적으로는 많지만, 권력과 돈이 없는 민중은 결국 봉기를 일으킨다. 자본가는 도망가고 성직자와 공권력을 지배했던 자들도 그들의 살길을 찾기에 여념이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을 작품은 ‘혁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혁명적 상황에서도 관성적으로 비합리적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봉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작가는 고지식한 ‘힐제’ 노인을 정부군–어쩌면 그가 심적으로나마 옹호했던 정부–의 총탄 세례 가운데 사망하게 한다.


◆혁명에 대한 단상

어린 시절 혁명을 꿈꿨다. 세상이 바뀌는 게 옳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혁명의 무용론을 생각한다. 역사는 헤겔의 변증법을 따르지 않는다. 혁명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도 않았고,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도 않았다. 자유와 평등이 주어졌고, 개인이라는 개념이 생성됐다. 그리고 절대적 힘을 가지고 있었던 왕도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은 불평등하고 자유가 제한받고 있으며, 집단의 논리에 개인이 희생되고 있다. 언제 혁명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게 매시간, 매분, 매초이다. 이런 불만의 진동이 분노의 파장이 되고 봉기의 파도가 돼 일어나기까지는 다양한 현상이 복합적으로 일어나야만 한다.

작가는 혁명을 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럼 그는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사랑, 베품 등을 생각한 것이었을까? 혁명이라는 이름을 걸고 봉기한 민중들을 제어하고, 미연에 막기 위해서는 자비, 즉 기독교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작품은 혁명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혁명의 원인은 바로 배고픔과 가난이었다.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조차 보장되지 않으면, 민중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죽는 게 마찬가지니까. 그들은 가치를 위해서 궐기 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생존을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것이다. 여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 먹물들의 역할이고.

◆작가가 원하지 않았더라도

작가는 1912년에 독일어권 작가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웁트만이 생존했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상황은 혁명의 시대라고 할 만큼 유럽이 시끄러웠다. 혁명이 꼭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자유와 평등사상을 확산시킨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길쌈쟁이들』도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작가의 정치적 행보 등을 고려할 때, 그는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으로 인정받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정치 작품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더라도 독자들은 그의 작품을 정치적으로 훑으면서 내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대로 해석하면서 조금씩 원칙을 수립해 나갔을 듯하다.

“사람들이 ‘연민’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적이고 일반적인 인간 정서”를 토대로 본 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왜 정치 문학으로 이해되고 있을까? 작가는 정치와 기독교의 관계를 애써 부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유럽의 고전 작품을 읽으면 등장하는 공통점

나는 유럽 문학을 영미 문학이나 국문학보다 많이 읽었고, 좋아한다. 문학적 편식이라고 해도 인정할 만큼 유럽 문학에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두고 책을 읽는다. 그러면서 알게 됐는데 유럽 문학, 특히 조금 오래된 고전에는 항상 등장하는 요소가 있다.

하나는 정치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에 대해 작품들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서술한다. 정치적인 부분이야,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되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원래 있어서는 안 되는 부분인데, 기독교가 정치화 되면서, 그리고 기득권층이 되면서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하웁트만은 기독교적인 메시지와 정치적 메시지를 구분하려고 하지만, 이미 서양의 기독교가 정치화 된 게 중세 이전이니, 그 둘을 떼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기독교 인구가 늘어나자, 종교와 상관없이 선거철만 되면 많은 후보자들이 교회 앞을 서성거린다. 현재 대통령도 그렇게 했고... 그런데 납득하기 어려운 일은 서양에서는 적어도 150년 넘게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는데도 교회는 여전히 생존하고 있다.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그 영역을 넓혀 나간 것을 보면, 그 생명력과 번식력은 잡초에 빗댈 수 있을 듯하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알곡과 쭉정이’ 비유가 떠오르는 데, 비판적 해석을 하자면 현대판 쭉정이에 해당하는 게 바로 기독교이다.

어쨌든 당장 머문 서식지에서 버틸 수 없으면 눈을 돌려 새로운 땅을 개척한다. 이런 일을 다른 말로 선교라고 한다. 그런데, 선교라는 이름으로 착취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이 역시 비판받아 마땅하다. 순교의 종교, 가난한 자들의 종교, 저항의 종교, 사랑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현재는 가해자의 종교, 부자들의 종교, 피착취자들의 종교이자 무자비한 종교가 돼 버렸으니...

이런 고전 작품의 비판적 요소는 바로 우리나라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현재 정치에서는 포용의 정치가 보이지 않는다. 이미 소인배 정치로 전락한 지 오래다. 우연히 기독교도 이런 정치적 분위기에 호응해 20세기 말부터 ‘개독교’라 불리기 시작하더니 현재는 수많은 미디어의 농락거리로 전락했다. 회복을 위해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어야 하고 실제로 쇄신해야 할 텐데, 그 잘못을 부인하기 바쁘고, 혹은 사탄의 계교라고 선포하니 발전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그런 목사 혹은 ‘먹사’들의 감정실린 말에 ‘아멘’으로 호응하는 수준의 일반 기독교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에 교회 개혁은 쉽지 않을 듯하다. 쓴 소리를 뱉는 사람들의 힘은 약하고, 혁신과 혁명적인 성격이 무뎌진 현대 기독교는 이미 몰락했다. 소멸까지는 아니어서 다시 상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도 같은데, 현재 분위기를 보면 쉽지 않을 듯하다.

※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매주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최근에 아내가 듣는 김동호 목사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김동호 목사는 일흔을 넘기셨고, 내가 나가는 교회의 목사는 40대 후반입니다. 요즘은 한 세대를 20년 정도로 보기도 하니까, 분명 세대가 다른 목사들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두 목사의 신론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을 하니까, 아내는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저는 조금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서 ‘전지전능’이라는 말을 생각해 봤습니다. 모든 걸 다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스 ·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만큼 인간적이지는 않지만, 인간적인 성격이 드러납니다.

물론, 교회는 이런 하나님의 성격을 당연하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면서도, 무소불위한 전능성을 그대로 가져갑니다. 특히 인간을 테스트 하는 신의 모습은 왠지 석연치 않습니다. 해석이 분분하니 현재 기독교가 ‘이어령 비어령(耳於鈴 鼻於鈴)’하는 것은 당연한 듯합니다. 현재에 맞는 신론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시대는 바뀌었는데 21세기 교회가 아니라 19세기 교회를 보는 듯해서 가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간 듯한 기분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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