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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잔(20)]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파우스트』

- 메피스토펠레스를 극복한 파우스트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3.08.10 02:04 의견 0

괴테의 『파우스트』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놀라운 사실이지만, 있다. 얼마 전에 독일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현지 가이드가 “지난번에 대학생들 연수를 진행한 적 있는데, 괴테의 『파우스트』를 모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라고 말하자 중장년층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놀람과 어처구니없다는 “하~”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청년들의 독서 수준이 문제일까? 아니면, 괴테가 너무 과거의 사람인 것일까? 매년 연극으로 새롭게 제작돼 공연되고 있고, 각종 문학지면에 본 작품을 설명하는 게 연례행사인데도 모르는 세대가 출현한 것이 현실이다.

나는 괴테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처음 만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작문 시간에 추천받아 토론 교재로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우리 작문 선생님의 교재 선정은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당시에는 숙제로 읽는 것 외에 특별한 감명은 없었으나, 마흔이 넘어 다시 읽어보니, 고전주의 시대를 넘어서 낭만주의 시대를 이끄는 괴테문학의 선명한 자취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읽었던 작품이 바로 『파우스트』였다. 성경의 욥기를 모티브로 구성된 작품인데, 고통 받는 욥과 파우스트는 너무나 다른 처지이다. 온갖 향락을 즐기는 파우스트는 순간에 집착하지 않는, 그리고 개인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을 극복하는 서사구조인데 반해 처절하게 이리저리 얻어터지는 욥은 그를 승리자라 하기가 왠지 어색하다. 그래서 둘을 비교하면, 파우스트는 행복에 겨운 사람이다.

어쨌든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읽은 『파우스트』는 그냥 위대한 명작을 읽었다는 감흥 외에 어떤 교훈도 얻을 수 없었다. 그냥 고딩이 괴테를 읽었다는 것 자체가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나만 이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주변에 여러 사람들의 반응도 나와 다르지 않았으니까. 명작은 나이가 들어서 그 맛을 더 깊이 음미할 수 있기에 그 가치가 더 풍성해지는 듯하다.

괴테를 떠올리면, 그의 연인이었던 베티나가 떠오른다. 밀란 쿤데라는 그의 작품 『불멸』에서 10대 베티나가 이미 인생의 황혼녘을 한참 지나고 있었던 괴테의 연인이 됐던 이유를 ‘불멸’에 대한 욕망이었다고 주장한다. 철저히 베티나의 욕망에 대한 관점을 해석했을 때 그렇다.

그러나 괴테의 시각으로 본다면, 베티나는 젊음의 기운을 느끼게 해주는 연인이었을 것이다. 괴테는 많은 여성과 연인관계를 유지했던 작가인데, 낭만주의 문학의 대가답게 사랑이라는 주제를 쓰기 위해서 그에게는 충분한 경험이 필요했었을 것이다. 덕분에 비극이든, 희극이든 사랑이라는 주제는 그의 작품에서 끊임없이 다뤄진다. 『파우스트』에서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랑을 다루고 있고 말이다.

그러나 괴테가 로맨스 작품에만 매진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괴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우스트』는 괴테의 20대부터 시작해서 말년에 이르기까지 60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라고 한다. 18세기 중후반을 거쳐 19세기 초반을 한참 지난 시기까지 작품을 쓰고, 또 쓰고, 고치고 완성한 것이다.

18세기는 이미 중세를 한참 지난 시점이었고, 종교 전쟁의 아픔도 어느 정도 지난 시점이다. 그의 중장년 시절에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호령했고, 덕분에 민족주의도 나폴레옹의 말발굽과 함께 한참 전파됐던 시점이다. 그리고 괴테의 말년에는 공산주의 사상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시절이었다. 『파우스트』는 이런 역사적 변곡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그래서 작품은 사탄의 유혹에 저항하는 인간, 즉 신앙적인 인간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 ‘순간의 만족’을 극복하고 지속성을 택하는 파우스트를 통해 변화하는 역사의 과정을 담고 있다.


◆종교, 진보, 공동체

『파우스트』를 읽다보면 처음에는 성경의 욥기를 떠오르게 하지만, 실제로 성경적인 인물의 등장은 거의 없다. 주인공 파우스트와 초반에 그와 사랑을 나누는 연인 ‘마르가레테’ 정도가 기독교인일 뿐이다. 오히려 작품은 당시 기독교의 폐단을 지적한다. 교회의 부정축재와 성직자들의 타락 등을 다루면서 교회를 비판한다.

아울러 대부분 작품에 등장하는 명칭이나 인물들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등장하는 신, 정령 등을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데, 중세가 극복되고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낭만주의에 이르러서 딱딱하고 보수적인 기독교의 성인들보다는 보다는 자유로운 그리스·로마 신화적 요소가 작품을 더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보다 인간적인 분위기는 희랍의 문화일 테니까. 그러나 개인적 색채가 짙은 그리스 · 로마적인 분위기가 작품의 핵심은 아니다. 작가는 파우스트의 행동과 이동, 그리고 깨달음을 통해 진보를 주장한다.

“비록 안전하진 않지만 자유롭게 일하며 살 수 있는 삶의 터전을 수백만 명에게 마련해 주고 싶네.”(본문 중)

파우스트는 개인의 향락에 빠져 연인의 사랑을 갈구하기도 했고, 그러면서 순간에 머무를 수도 있었지만, 결국 개인의 안위라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서서 ‘수백만 명’을 생각한다. 요즘 말로 사회적 참여, 혹은 올바른 정치 대한 의지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낭만주의가 개인의 감정, 향락에 대한 호기심과 열의를 반영한 사조라면, 괴테는 말년에 이런 낭만주의에 대해서 허무함을 느꼈을 수도 있다. 사랑, 청춘, 낭만, 쾌락 등 모두 죽음을 앞둔 백발의 노인한테는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작품 속에서 공동체주의를 찾는 것은 너무 작위적이다.

파우스트의 ‘수백만 명’에 대한 생각은 한 위대한 인간의 인도주의의 단편으로 해석하는 게 적절할 듯하다. 그러나 1830년대부터 시작하는 유럽 전역의 혁명과 작품을 같이 본다면, 계급, 민족, 유산자, 무산자 등의 갈등이 시작하는 시점에 『파우스트』는 종점에 도착한 셈이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보수이고 진보일까?

진보라는 말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다. 그래서 다들 좋은 뜻이라고 생각한다. 청년시절에는 진보라는 단어를 가슴 속 한쪽에 배지처럼 달고 다닌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진보를 집어치우고 보수로 갈아탄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진보의 매력은 변화에 대한 갈망이자,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어디에 정착하기 시작하면 변화가 달갑지 않다.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의 등장만 하더라도 과거에는 지혜의 보고로 존중받았던 어르신들이 점점 도태되는 전환점이 됐다. 이 외에도 급진적인 변화는 기존 기성세대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인 경우가 꽤 있다. 이쯤 되면, 변화는 진보가 아니라, 세대 갈등의 원인이 된다.

마약 청정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사라졌다. 연예인, 재벌가의 자녀들, 심지어 고등학생들한테까지 마약이 전달되고 있다. 급변은 결국 세대 갈등, 사회적 아노미 현상 등과 같은 부작용을 파생시키면서 사회비용 소모를 극대화 시킨다.

이러다 보니, 보수도 아닌 보수가 설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60대 이상의 많은 국민은 사건의 시비(是非)를 따지지 않는다. 그들이 함께 할 수 있고,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시공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대통령이 못해도 상관없다. 그들을 무시하는 아래세대보다 낫게 여긴다.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손주들한테도 무시당하는 현실을 살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진보는 특정 계급이나 계층을 위한 나아감이 아니라 같이 나아갈 때 진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의 진보는 보수의 대립어로 사용될 뿐이다. 그런데, 진보가 보수와 대립하지 않는다. 보수와 진보 모두 권력을 추구한다. 그리고 국민을 위한 게 아니라 특정 계급을 위한 정책을 만든다. 모두의 동의를 얻을 수 없는 편협한 법들이 난무하다. 보편성이 사라진 것이다. 보수는 도대체 뭘 지키고, 진보는 뭘 발전시키는 것일까? 혹, 그들이 자기만족을 위해서 그렇게 여긴다면, 진보든 보수든 언어도단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파우스트여! 악마의 속삼임을 이겨냈구나!

순간에 머무는 순간 파우스트는 영원히 악마의 것이 된다. 악마는 파우스트에게 경험하지 못할 젊음, 사랑, 향락, 권세 등을 제안했고 파우스트 역시 그 모든 것에 현혹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에 머무르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개인에게 맞춰진 모든 것은 그가 추구한 지혜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지혜 대신 ‘공동체’를 선택한다.

우리 현실은 메피스토펠레스가 등장하지 않아도 언제나 순간의 향락에 넘어가는 사람이 대다수다. 물질만능주의, 이기주의, 사회적 갈등 등. 모두 순간에 집착하는 것들의 후유증이다. 좋은 사람을 선택한 게 아니라 더 싫은 사람을 선택하지 않은 우리 선거의 모습을 보면, 메피스토펠레스의 아래 것들이 등장해도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욜로’를 외치면서 이 순간의 즐거움을 택한 이 시대에 메피스토펠레스를 이겨낸 파우스트의 용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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