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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잔(22)]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말테의 수기』

- 시인의 언어는 책임을 지는 언어이다!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3.09.13 20:11 의견 0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어떤 책에서 읽은 문장이다. 아쉽게도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문장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문구의 주인공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장미꽃을 예찬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유명한 말이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 릴케를 접하고 난 후, 시(時)에는 관심이 일도 없었던 나에게 시를 감상해야겠다는 마음을 불어 넣어주었다. 대학 시절 릴케 전집이 국내에 번역돼 나오기 시작했고, 당연히 용돈을 조금씩 아껴가며 조금이나마 가슴으로 그의 작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산 책은 20년도 넘은 애서로, 지금은 표지의 색이 바랬지만 작은 책장 속에 보관 중이다.

20대부터 3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릴케는 고독, 죽음, 비, 장미꽃 등을 생각하게 하고, 보고 듣게 하는 나침반 역할을 해주었다. 릴케는 니체와의 삼각관계로도 유명하고 당대 유럽의 3대 시인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세밀하며, 감성이 넘치면서도 적지 않은 깊이가 있어서 낭독자로 하여금 황홀한 오로라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말테의 수기』는 릴케의 어린 시절 불렸던 이름을 사용하며, 일기체 형식으로 쓴 글이다. 파리에 머물며 대도시의 삭막함, 고독, 화려함 뒤에 감춰진 추함 등을 전달하기도 했고, 사사로운 일상이 시인의 언어와 결합돼 풍성하게 전달된다. 어떤 줄거리가 있는 글이 아니라, 그가 생활하면서 느낀 그대로를 일기처럼 쓴 글이어서 한 단어, 한 구절, 한 문장 릴케의 섬세함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년이 쓴 듯한 수기를 읽을 수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말테는 28살인데(물론, 당시 28살은 적은 나이가 아니다), 독자에 따라서는 더 어린 소년이, 혹은 불혹을 넘긴 나이든 작가의 모습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작품의 기록은 미세한 바람에도 떨어질 듯 풀잎에 매달려 있는 새벽이슬 같지만, 다루는 대상은 고독, 아픔, 추억, 죽음, 삶 등으로 가볍지 않은 것들이어서 작가의 섬세한 표현의 능력이 더 돋보인다. 마치 거대한 고목을 쓰러뜨리는 도구로 톱이나 도끼가 아닌 아이들 소꿉놀이 칼을 사용하는데도 조금씩 기울어지는 거목이 떠오르게 한다.


◆삶에 대한 진지한 시인의 태도

시인은 작은 일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작품은 줄거리가 없어서 쉽게 읽히는 글도 아니지만, 시인이 한 구절 한 구절 선명하게 연필로 꾹꾹 눌러 종이에 글씨를 쓰듯 표현하기 때문에 스킵해서 읽기에 어울리지 않는 책이다. 절대로 속독해서 읽어서는 안 되는 작품이다.

죽음, 인생, 고독, 사랑 등을 다루는 데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닐까? 시인은 다루는 대상이나 자신의 생각을 굉장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시적으로 표현하는 데, 읽다보면, 프랑스의 작가 마르셸 프루스트(릴케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다)의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서』가 떠오르게 한다. 물론, 분량의 차이는 비교할 게 아니지만 기억하는 사건을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독자가 쉽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게 하는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작은 것 하나도 세세하게 기억해서 글로 남긴다는 것은, 물론 작가만의 스킬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삶의 짧은 순간조차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연탄재를 보고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해준 적 있냐고 묻는 시인이 있을 정도로 작은 것에 연연하는 게 시인들이다. 릴케 역시 자신의 추억, 기억, 순간, 혹은 공간, 시간 등 모두 세밀하게 기억해서 글로 남긴다.

특히, 시인이 느낀 것들에 대한 감정처리는 시인 특유의 애수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삶의 작은 한 조각조차도 버리지 않으면서도, 큰 도시 속 삶을 동경하는 현대인들의 거추장스러움을 단단히 비판한다. 파리의 화려함을 동경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고독과 죽음을 느꼈던 시인은 고독과 죽음을 그만의 애잔한 언어로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그런 시적 언어에 동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독자의 동감은 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진지한 태도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20대 시절, 이 말의 방점은 ‘죽음’에 찍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40대 중반이 넘은 지금, 이 말은 ‘삶’에 찍혀 있다. 죽음이 완성이 되기 위해서는 삶을 대충 살아서는 안 된다. 책임 있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시인은 작품 속에서 시는 나이가 들어서 써야 한다고 말한다.

아, 그러나 사람이 젊어서 시를 쓰게 되면,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 ~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시들,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만 한다. (본문 중)

제대로 된 시인이라면 시를 완성하기까지 수없이 고쳐 쓰기를 한다. 스스로 선택한 언어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의지의 표명이다. 마찬가지다. 살아가는 동안 삶의 중책을 지듯 살아갈 때, 죽음이 삶의 완성이 될 수 있다. 혹 그렇지 못하다면, 죽음은 미완성으로 그칠 뿐이다.

릴케가 실제로 자신의 죽음을 완성이라고 생각했을까? 시인의 양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을까? 백혈병으로 갑작스럽게 죽어가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완성이라고 생각했을까? 겸손한 시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양성적인 특유함은 그의 표현을 독특하고 풍성하게 만들어줬을지 몰라도, 어딘가에 전적으로 속하지 못한 인간으로 살게 했다.

현대인은 삶을 낭비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정작 관심 가져야 할 것은 놓치고, 소중하게 여겨야할 것들은 외면하면서, 더 큰 것, 더 넓은 것, 더 많은 것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 없고 가지려 해도 거둬들일 수 없는 것들, 즉 허망한 것들에 대한 욕망으로 삶은 피폐해지고, 결국 스스로 루저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현대인이다. 현대인은 릴케의 감수성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찰나조차도 소중하게 여기는 그의 책임감에 대한 현대인의 생각은 잘 모르면 동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는 언어의 본질이며 시는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다”

“시는 언어의 본질이며 시는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한 말이다. 우연히도 하이데거도 독일인이다. 압축된 말, 메타포를 담고 있는 언어, 그게 바로 시어이다. 최근에 우리는 줄임말을 사용한다. ‘안습’, ‘한남’, ‘지못미’, ‘볼매녀’ 등 긍정적인 언어도 있고, 그렇지 않은 언어도 있다. 그러나 단순히 줄인 언어이지, 메타포를 담고 있지는 않다. 뜻이 명확한 언어를 줄여서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를 좌절 시켜버린다. 그리고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꼰대’라고 비아냥거린다.

시어는 이런 언어도단과 다르다. 시어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다. 그리고 그 다름을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토론하게 되고, 교류할 수 있게 해준다. 누구도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배경지식에 따라서 조금 더 깊은 의미를 생각할 뿐이다. 그렇다면, 시어를 정치와 연결시키는 게 가능할까? 그리스의 대철학자 플라톤은 시인을 추방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시민을 현혹시킨다고 생각한 것이다.

동양에서도 시어는 자신의 정견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으로 여겨졌다. 고려 말 이방원과 정몽주의 ‘단심가’와 ‘하여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시어가 사라졌다. 혹, 시어로 이야기해도 알아 듣는 사람이 극소수다. 그러니, 해석이 필요한 말은 사라지고, 뜻조차 불분명한 외계어가 만들어지거나, 쓸데없이 말이 많아지는 세상이 된 것이다. 유튜브를 통해 정치인들의 말들을 듣다보면, 진지함 대신 말장난, 언어도단 등만 느껴질 뿐이다. ‘촌철살인’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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