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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분권_이야기(28)] ‘좋은 시민’이 되자!

3부: 미래 지방분권 시대의 주민은 청소년 #05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2.10.28 17:05 의견 0


1990년 대 이후로 세계적으로 ‘거버먼트(Government)’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안으로 ‘거버넌스(Governance)’가 부상했습니다.

거버넌스는 ‘(키를) 조종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Kubernan’에서 온 것으로 거버먼트와 유사하게 사용되었으나(혹은 거버먼트와 같은 의미로도 사용한다) 독일의 정치학자 칼 도이치(Karl w. Deutshcht)가 ‘키잡이 수로 안내인’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Kubernetics’에서 나온 사이버네틱스를 정치에 적용해 거버넌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고 합니다.

즉, 정부가 혼자서만 키를 잡고 국가를 운영하다가 시민 사회와 키를 나눠 잡고 역할 분담해서 나아가기로 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양자의 관계가 수직적이었다면, 수평적인 관계로, 그 형태도 위계적인 형태에서 네트워크 형태로 변화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고요.

요컨대, 다원화된 세계를 잘 굴러가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통치 축도 다원화해야만 했던 것이죠. 기존 관료들만으로는 국민, 혹은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사항을 충족시키기도 어려웠고, 욕구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구상하고 실천한다고 해도 정작 그 수혜자들인 국민이 만족하지 못한다면, 좋은 정책이라고 할 수 없겠죠? 그러다 보니, 이제 정책을 구상하는 데부터 실행에 이르기까지 민간차원의 참여, 논의, 평가 등이 절실해졌습니다. 이렇게 민간차원이 성장하게 원인으로는 경제발전과 고등교육의 확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1960년대에 ‘보릿고개’가 존재했습니다. 하루 세끼조차 제대로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죠. 이런 상황 속에서 정부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국민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더욱이 독재정치와 군부정치로 1980년대 말까지 민주주의가 억눌린 상태였으니, 민간분야 정치 세력의 성장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경제가 성장하고 문민정권이 창출된 후부터 본격적으로 민간부분의 권력이 성장했고, 적극적인 참여가 가능해 졌습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기 어려웠지만, 현재는 대학 정원이 신입생을 모두 충원하고도 남는 상황이 됐으니, 많은 국민이 고등 교육(대학교)까지 쉽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니 배움의 길을 더 연장할 수 있었고 그 가운데서 정치·사회적 의식이 향상됐습니다. 물론, 이 외에도 거버넌스 등장의 요인으로 서구 복지국가의 재정적 위기, 대의 민주주의 한계 등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민관거버넌스가 조성돼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해서 바로 좋은 효과가 나온 것은 아닙니다. 시행착오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경우 시민단체가 1990년대 이후 우후죽순 생성되기 시작했는데, 양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질이 좋은 게 아니듯이 간판만 덩그러니 설치한 페이퍼 단체도 많았습니다. 아울러 일부 시민단체는 정부 편향적이어서 ‘어용(御用)’단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요.

시민단체의 목적은 단체가 추구하는 운동의 범대중적 확대와 이에 따른 인식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체 대표가 기존 정치에 참여하면서 시민 단체 활동이 정치의 등용문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20대 대선 과정에서도 한 여성 운동대표가 보수정당을 지지하고 입당하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탈당하는 해프닝을 보여줬는데, 21세기가 한 참 지난 현재도 이와 같은 행태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죠.

민관거버넌스라고 할 때, ‘민(民)’은 유일하게 ‘관(官)’견제할 수 있는 주체입니다. 그래서 민의 역할을 하는 시민단체가 기존 정치권에 흡수될 경우 시민단체의 운동 역시 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민단체 운동의 현실화를 위해서 정치에 참여했다고도 변명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와 같이 이념이 부재(남북이 나누어져있어서 이념 논쟁이 여전히 존재합니다)하고 정치인의 신념보다 ‘당리당략(黨利黨略)’에 의해 좌우되는 정치 풍토에서 운동의 현실화를 부르짖는 것은 ‘억지 춘향 격’으로 보입니다.

역시 입신양명(立身揚名) 출세주의에 혈안된 시민단체 대표들의 궁색한 변명인 셈이죠. 결국, 이런 현상도 시민단체가 ‘중앙 집중화’돼 있기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중앙정치에 참여해서 한 역할 해야, 확실하게 지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더욱더 ‘지방분권’이 필요합니다.

지방분권이 이뤄지면, 여전히 중앙권력에 기생하려는 부류도 있겠으나 현재보다 더 많은 단체와 시민들이 지역 문제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제 추상적인 시민운동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주도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관광지입니다. 불특정 다수가 찾는 지역이다 보니, 쓰레기 문제로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아시다 시피, 국가적으로는 환경보존이라는 추상적인 표어를 하염없이 전국으로 흩뿌리고 재활용이라는 실행방안을 문자로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런 추상화된 언어를 구체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곳이 바로 지역이고요.

제주도는 쓰레기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지역 곳곳에 ‘클린 존’을 만들었습니다. 누구나 근거리에 위치한 ‘클린 존’에서 분리수거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클린 존은 이후 다른 자치지역(대구광역시)에서 벤치마킹해서 실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클린 존’을 확대 발전시킨 ‘클린하우스’를 만들어서 보다 청결하게 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클린하우스’는 겉으로 봤을 때는 분리수거장인 줄도 모를 정도로 주변 풍경과 조화롭게 설치돼 있었습니다. 쓰레기 냄새 문제도 혁신적으로 해소해서 주변에 악취가 거의 나지 않았고요. 오죽하면 각 지역에서 경쟁적으로 시설을 유치하려고 했을까요? 그리고 분리 수거된 쓰레기는 새로운 자원으로 활용 될 수 있도록 관련 업체에 판매해서 수익을 창출했고 클린하우스에 관리인을 상주시켜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실행한 것이죠. 중앙정부의 추상화가 지역으로 내려가 지역 풍경을 반영한 정밀화가 된 것이죠.

청소년들이 살아야 할 대한민국은 ‘중앙집권’이 아니라 ‘탈중앙’, ‘분권화’가 이뤄진 시대여야 합니다. 많은 시민의 다양한 니즈를 이해하고 해소할 수 있는 노력과 능력이 지방 자체에 있어야 합니다. 현재도 규모가 큰 자치광도의 지방자치단체는 중앙정부와 다르게 움직일 때도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지역을 위해서라기보다 당리당략에 따른다는 것이죠. 이런 지역문제와 괴리된–당리당략을 따르는–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좋은 시민’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시민이 ‘좋은 시민’일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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