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클 학습 문화
1980년대 중후반 대학가의 서클 학습은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이는 단순한 학문 탐구가 아니라, 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서클의 학습은 극도로 엄격했다. 참여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모여 텍스트를 함께 읽었다. 한 사람이 소리 내어 읽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 내용을 분석하고 토론했다.
NL 성향의 서클에서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과 1985년 논문이 핵심 텍스트였다. 한완상의 《민중사회학》도 함께 읽혔다. 이들은 박현채의 '신식민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밤새 토론했다. "한국이 정말 신식민지인가?", "미국을 몰아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같은 질문들이 오갔다.
PD 성향의 서클에서는 이대근의 논문과 김수행의 『자본론』 해설이 핵심 텍스트였다. 『자본론』은 1980년대 초중반에는 불법 복제본이나 일본어 중역본으로 학습했고, 1989년 김수행의 정식 완역본이 비봉출판사에서 출간되면서 학습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들은 이대근의 '국가독점자본주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한국 경제 통계를 분석했다. "한국 자본주의는 정말 고도로 발전했는가?", "노동자 계급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같은 질문들이 오갔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국가와 혁명』은 NL과 PD 모두에서 읽혔지만, 해석은 달랐다. 체 게바라의 『게릴라전』, 마오쩌둥의 저작,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등도 읽혔다. 이런 책들은 모두 금서였다. 정식 출판본을 구할 수 없었고, 복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유통되었다. 한 권의 책이 여러 서클을 돌아다니며 수십 명에게 읽혔다.
학습의 강도는 높았다. 밤을 새워 토론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방학 때는 '합숙 세미나'를 열어 며칠씩 한 장소에 모여 집중적으로 학습했다.
이 과정에서 서클 멤버들 사이에는 강한 동지애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노선이 다른 서클과는 극심한 대립도 존재했다. NL 서클과 PD 서클 멤버들은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거의 대화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박현채가 옳으냐, 이대근이 옳으냐"는 단순한 학술 논쟁이 아니라 생사를 건 노선 투쟁이었다.
❚금서의 복사와 유통
금서의 유통 방식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였다. 복사기가 있는 곳을 찾아 몰래 복사하고, 그것을 다시 제본하여 유통했다.
복사본은 대부분 표지 없이 유통되었다. 들고 다니다가 검문에 걸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목도 암호처럼 바꿔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을 '민경', 『자본론』을 '경제학 교재', 레닌의 저작을 '러시아 혁명사' 등으로 위장했다.
유통 과정에서 적발되면 구속되거나 제적당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서의 유통은 계속되었다.
❚구호에 드러난 노선 차이: 박현채 vs 이대근
서클의 노선 차이는 구호에서도 명확히 드러났다. 구호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박현채와 이대근의 이론적 차이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NL 계열의 구호는 박현채의 신식민지론을 반영했다. "미제는 물러가라", "양키 고 홈"은 박현채가 강조한 외세 지배를 거부하는 구호였다. "반미 자주화", "조국 통일", "미군 철수"도 박현채의 민족 모순론에서 나온 것이었다.
PD 계열의 구호는 이대근과 김수행의 계급 모순론을 반영했다. "노동 해방, 세상 해방", "계급 해방 만세"는 이대근이 강조한 자본주의적 착취를 거부하는 구호였다. "노동자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 "착취 없는 사회"도 이대근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서 나온 것이었다. "최저임금 보장", "노동 3권 쟁취" 같은 구체적인 노동 요구도 계급 모순에 주목한 PD 계열의 특징이었다.
양측 모두 "독재 타도, 민주 쟁취"라는 구호는 공유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는 군부 독재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재가 약화된 이후에는 박현채를 따르는 NL은 반미 투쟁으로, 이대근·김수행을 따르는 PD는 노동 투쟁으로 초점을 이동시켰다.
❚전대협과 한총련: NL 노선의 장악
1987년 8월 19일, 전국 대학의 학생회가 충남대에서 연합하여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창립했다. 전대협은 1993년까지 한국 학생운동의 최대 연합체로 기능했다.
전대협은 창립 초기부터 NL 노선, 즉 박현채의 이론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980년대 후반 대학가에서 NL이 다수파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전대협의 주요 사업은 박현채가 강조한 대로 반미·반파쇼 투쟁, 통일 운동 등이었다. "미군 철수", "주한미군 범죄 규탄" 등이 핵심 의제였다.
1989년 임수경의 평양 방문, 1991년 강경대 열사 추모 투쟁 등 전대협이 주도한 주요 사건들은 모두 박현채의 신식민지론과 NL 노선의 실천이었다. 전대협 내에서 주체사상을 수용한 주사파가 주류를 형성하면서, 반미 투쟁은 더욱 급진화되었다.
1993년 3월 전대협이 대의원 총회를 통해 공식 해체를 선언한 후, 4월 27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이 창립되었다. 한총련 역시 NL 노선을 계승했다. 한총련은 2000년대 초반까지 학생운동을 주도하며, 박현채가 강조한 통일 운동과 반미 투쟁을 지속했다.
❚PD 계열의 독자 조직화와 현장 파견
반면 PD 계열은 전대협이나 한총련 같은 대규모 조직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이대근과 김수행의 이론을 따르는 PD 계열은 소수파였기 때문이다.
대신 PD 계열은 '강철서신' 그룹, '구학련(구국학생연맹)' 등 독자적인 조직을 형성했다. 또는 학생운동보다는 노동 현장으로 직접 투신하는 '현장 파견' 활동에 주력했다.
PD 계열의 핵심 전략은 이대근과 김수행이 강조한 대로 노동자 계급 조직화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공장에 취업하여 노동자로 살며 노동조합 건설에 헌신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박현채의 민족 해방보다는 이대근의 계급 해방, 김수행이 번역한 『자본론』의 이론을 현장에서 실천하려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