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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여성으로 국내 최초" 전 올림픽수영 국가대표 박성원 감독

· ‘명선수는 명장이 될 수 없다’ 불문율 깨고 현재까지 13년 넘게 국가대표 지도자로 맹활약
· ‘바뀐 올림픽 출전 제도 영향으로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에게는 타격 클 것’ 쓴소리도...

글렌다 박 기자 승인 2020.02.08 14:36 | 최종 수정 2020.02.10 02:29 의견 5
현재 총감독을 맡고 있는 C.R.S. 팀 선수들의 2017년 전국소년체전 금메달 획득 당시.
(사진제공: 박성원) 

박성원 감독은 지난달 국가대표 꿈나무 동계합숙훈련을 마쳤다. 2019년 4월부터 국가대표 꿈나무 전임지도자로 부임한 박성원 감독이다.

“꿈나무 선수들은 말 그대로 어린 선수들이기에 가르치는 걸 스펀지처럼 받아들이고, 선수 중 70%가 체육중학교 진학 예정자이기 때문에 이 60명의 선수가 앞으로 수영계를 이끌어갈 재목들이라는 점에 가장 뿌듯했습니다.”

오랜 기간 성인 국가대표를 지도해온 박성원 감독이기에 꿈나무 선수를 지도하는 것에 애로사항도 있다. 특히 하계합숙과 동계합숙은 하늘과 땅 차이다. 쑥쑥 크는 성장기인 만큼 성격, 외모 등이 많이 변하고, 2차 성징과 사춘기가 시작돼 이성 간의 호기심도 많다.

무엇보다 ‘국가대표’라는 자부심이나 긍지를 가질 만큼 성숙하지 않아 국외 경기에서 외국 코치와 외국 선수와 대면할 때의 태도는 성인 국가대표와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러나 꿈나무 선수들에게 애정을 가지는 건 그녀가 꿈나무 나이 또래일 때의 기억을 간직하기 때문이다.

2019년 수영 꿈나무선수 동계합숙훈련 마지막 날, 지도자 선생님들과 함께. 지난 2019년 12월 26일 부터 2020년 1월 7일까지 12박 13일 기간 동안 제주도에서 실시된 수영 꿈나무 동계합숙훈련에서는 10명의 지도자와 60명의 선수들이 참가했다. (사진제공: 강수미)

수영 입문 2년 만에 ‘최연소 국가대표 발탁’ 수영 천재의 신화

박성원 감독은 초등학교 4학년 때 호텔 수영장에서 아버지에게 처음 수영을 배웠다. 특이하게도 아버지는 평영을 가르쳐주셨다. 부산 수영초등학교 시절, 수영부 감독님은 반마다 돌아다니며 수영부원을 모집했고 박성원 감독은 호기심 어린 마음에 “저요!”하고 손들었던 게 수영선수 입문의 시작이었다.

4학년 여름이 지나 아버지 직장 때문에 광주광역시로 이사를 하게 됐다. 수영부 감독님께서는 “성원이가 전학을 가도 꼭 수영시키시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래서 광주에서도 수영부가 있는 대성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고, 1년 후 전국대회에 첫 출전을 하게 됐다.

100m 부문에 출전했지만, 중간인 75m 지점에서 멈췄다. 현실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 이후 그녀는 광주에서 서울의 클럽으로 방학마다 ‘훈련 유학’을 갔다. 6학년 올라가 개인혼영 200m에서 동메달을 땄다. 첫 메달이었다. ‘국가대표 박성원’의 길을 연 신호탄이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이 되며 소년체전에 출전한 그녀는 평영 50m에서 예선 1위로 통과했다.

당시 마음 졸였던 부모님은 ‘이대로 경기가 끝났으면’하고 바랐다. 부모님의 걱정과 달리 그녀는 결승도 1위를 차지했다. 소년체전의 결과 처음으로 국가대표 상비군에 발탁되었다.

박성원 감독은 자신의 시합 중 기억에 남는 시합으로 중학교 1학년이었던 1984년 11월에 열린 대구대통령배대회를 꼽는다. 원래는 전국체전보다 앞서 치러져야 했던 대회였지만 1984년 LA 올림픽 때문에 전국체전이 먼저 열렸다. 선배 선수들이 시즌을 진작 마감하는 바람에 국가대표를 비롯한 엘리트 선수들이 대거 불참한 대회이기도 했다.

박성원 선수는 이 대회 마지막 날 평영 100m 경기에서 한국신기록을 세웠다. 인생 첫 한국신기록이었고, 대회의 유일한 한국신기록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국신기록이었기에 다음 날 신문은 그녀의 이름으로 도배되었다. 그 후 상비군이 아닌 정식 국가대표 자격으로 당당히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

중학교 1학년 당시 대통령배수영대회의 평영 100m 부분에서 한국 신기록을 세운 박성원 감독. 1984년 12월 1일자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이듬해 정식 국가대표로 발탁 되었다.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쳐)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했던 악바리 - 또래 선수들 못 버티고 떠났지만, 끝까지 버텨내

“항상 전화하면 조용히 코만 훌쩍거리면서 몰래 울었어요. 우는 소리가 나면 부모님이 힘들어하실 테니까요.”

중학교 1학년의 나이에 광주에 계신 부모님과 떨어져 태릉선수촌에서 혼자 생활하기란 힘들었다. 많게는 10살이 차이가 나는 선배 선수들 틈에 껴서 훈련해야 했다. 이제 막 근육이 발달하기 시작한 중학생이 성인 국가대표 수준의 훈련 페이스를 따라가기가 당연히 쉽지 않았다.

학과공부도 해야 했다. 훈련 없는 시간엔 위탁 교육을 받는 태릉중학교에 가 수업을 들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영어, 일어학원에 다니기 위해 매일 종로까지 다녀야 했다. 벅찬 하루였다. 또래 선수들이 몇몇 있었지만 다들 얼마 못 버티고 퇴촌했다. 박성원 감독은 이를 악물었다.

“선생님께서 지도하시는 대로 무조건 했습니다. ‘국가대표는 다른 선수들 하는 만큼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항상 저 자신에게 되뇌었어요.”

1988년 출전했던 서울 올림픽은 특별한 추억이다. 박성원 감독은 한국신기록을 세웠고, 그녀의 뜨거운 열정에 관객은 기립 박수를 보냈다. 선수 생활 중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사진제공: 박성원)

◆기립박수 받았던 88년 서울올림픽 경기

국가대표 선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이다. 중학교 3학년, 15세의 나이로 아시안게임에 참가했다.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검은색 설사로 탈진해 링거를 맞아야 했지만, 평영 200m에서 3위를 하는 투혼을 보였다. 자랑스럽게 한복을 입고 시상대에 올라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평영 100m 준결승에서 조 1위를 하며 본인 기록이었던 한국신기록을 2년 만에 고쳐 썼다. 기록을 확인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관중석의 부모님에게 손을 흔들었고, 이에 전 관중이 호응하며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선수로서는 가장 행복하고 기쁜 추억이다.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에 재학중이던 2학년 때 국제 대회는 유니버시아드대회를 마지막으로, 국내에서는 전국체전을 끝으로 은퇴했다. 당시 그녀는 국내 순위 2위였고 더 운동하고 싶었지만, 연맹에서는 ‘나이가 많다‘, ’기회를 어린 후배들에게 준다’고 했다. 은퇴는 그녀가 원했던 선택이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들어온 정든 태릉선수촌도 떠나게 되었다. 국가대표 생활에 학창시절을 전부 바쳤던 그녀는 8년간 평영 100m와 200m에서 27차례나 한국신기록을 갈아치웠다. 체육포장을 비롯해 대통령표창장도 2회나 받았다. 전국체전에서 평영 100m와 200m에서 6연패를 했던 그녀는 단연 국가대표 중의 국가대표였다.

이른 은퇴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3년 뒤 돌아와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박성원 스위밍 클럽'을 열었다. 이후 9년간 수많은 엘리트 선수들을 배출했고 그중에는 국가대표 선수들도 나왔다.

은퇴 23년 만에 태릉선수촌에 '국가대표 코치'로 재입성 - 최초의 '여성 감독'

박성원스위밍클럽 소속 선수들이 빛을 발하자 자연스럽게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2001년 국가대표 상비군 지도자를 거쳐 2007년, 박성원 감독은 국가대표 코치진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때부터 8년 10개월간 국가대표 지도자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수영 대표팀 코치, 2009년 로마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대표팀 코치,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수영 대표팀 코치, 2009년, 2011년, 2013년 3회 연속 유니버시아드 수영 대표팀 감독,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수영 대표팀 코치, 2015년 카잔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대표팀 코치, 2016년 리우올림픽 수영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ROz_7u55VI

▲박태환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전은 1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최고의 명승부'로 손꼽힌다. (영상출처: 스브스스포츠)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올림픽 출전이 가장 기억에 남아

선수가 아닌 감독 생활을 하면서도 기뻤던 순간은 많았지만 2008년은 특별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전만 해도 한국 수영역사 상 가장 높은 성적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남유선 선수가 개인혼영 400m 결승 7위에 오른 것이었다. 특히 자유형은 ‘동양인이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박태환 선수가 자유형 400m에서 아시아신기록을 세우며 동양인으로서는 올림픽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땄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한계를 뛰어넘은 박태환 선수였고, 그는 수영의 새로운 역사를 썼다. 물론 그 뒤에는 박태환 선수가 최고의 실력을 낼 수 있게끔 노력했던 수많은 인물이 있었다. 박성원 감독도 그중 하나였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출전자가 확정된 후에 한국에서 내보낼 수 있는 출전선수 정원이 늘어서 제가 지도하던 파트 선수 3명의 올림픽 출전 확정이 승인되기까지의 3일 동안이 정말 꿈만 같이 행복했어요.”

실력이 우수한 선수라고 해도 '국가대표'는 평생의 꿈이다. 그러나 국가대표라고 해도 4년에 한 번 오는 올림픽 출전 기회를 얻기란 힘들다. 그 꿈을 이룬 국가대표 선수만큼, 함께 행복해하고, 함께 기뻐하는 박성원 감독이다.

그러나 항상 기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해외 전지훈련 중 사춘기 선수들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고, 2016년엔 올림픽을 앞두고 연맹이 와해되며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암울한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때마다 선수들을 생각하며 일어섰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당시 김지현 선수. (사진재공: 박성원)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당시. 가운데가 김지현 선수다. (사진제공: 박성원)

키운 선수 중 가장 아픈 손가락, 김지현 선수

수백 명의 유망 선수들과 국가대표들을 지도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아픈 손가락은 김지현 선수다. 김지현 선수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전국체전 배영 200m 6연패를 달성한 명실공히 국내 ‘배영 1인자’였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며 일본 전지훈련 중이었던 김지현 선수는 진천선수촌에서 불시에 실시한 약물검사에서 상시 금지약물인 '클렌부테롤' 성분이 검출되며 도핑방지위원회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결국 재팬오픈에 참가하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다.

공항에서 김지현 선수를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문제는 목감기를 위해 처방받은 약이었다. 김지현 선수는 자신이 국가대표임을 아는, 평소 자주 방문하는 의사로부터 처방을 받았기에 자신이 도핑에 걸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김지현 선수도 소명하고 의사도 청문회에 출석해 실수를 인정했지만,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는 김지현 선수에게 최고 수준에 해당하는 선수자격 정지 2년의 징계를 내렸다.

입대를 앞둔 김지현 선수는 이로 인해 상무로 갈 수 없었다. 현역으로 입대해 군 복무를 해야 해 선수생명의 위기에 마주쳤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으로 제대 후 7개월 뒤 제98회 전국체전에 출전해 배영 200m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그가 그동안 땄던 열한 개의 금메달보다 더 값진 은메달이었다. 서른이 넘은 지금도 현역 선수로 활동하는 그에게 박성원 감독은 아직도 뜨거운 응원을 보내고 있다.

박성원 감독의 지도 철학은 “무조건 선수가 우선”

박성원 감독에겐 “무조건 선수가 우선”이다. 지도하는 중·고등학생 선수들은 시즌 기간 중엔 화장을 금지한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전국체전을 마친 후에야 허락한다. 갑갑한 규율 같지만, 사춘기 남녀 선수들이 함께 훈련하는 만큼 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들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규율이다.

“선수는 선수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의범절’은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덕목이어요. 저는 선수들이 자신의 도리를 지키길 바랍니다.”

박성원 감독은 '할리데이비슨 스트리트글라이드' 기종을 소유한 '할리 데이비슨' 마니아이자, 10년째 여성 라이더 그룹인 ’라이더스 아프로디테‘의 회장으로 여가시간엔 라이딩을 즐긴다. (사진제공: 박성원)

박성원 감독의 특별한 취미: ‘할리 데이비드슨‘ 라이딩

박성원 감독이 국가대표 지도자로 태릉선수촌, 그리고 시간이 지나 태릉선수촌이 진촌선수촌으로 옮겨져 입촌해 있을 당시, 선수촌 주차장에는 수많은 자동차 외에 '할리 데이비드슨' 모터사이클이 주차되어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바로 박성원 감독의 모터사이클이었다.

많은 수영인에게 ‘박성원’은 '수영' 다음 '할리 데이비드슨'이 떠올려질 만큼 박성원 감독은 모터사이클 마니아다. 대학생이 된 그녀에게 박 감독의 아버지는 “차 사줄까? 아니면 오토바이 사줄까?” 질문했고, 그때부터 모터사이클이 취미가 되었다.

그동안 ‘할리 데이비드슨’에서 나온 '883', '솦데일', '다이나슈퍼글라이드커스텀', '로드킹' 기종을 소유했었고, 지금은 '스트리트글라이드'라는 대형 기종을 가지고 있다. 박성원 감독은 스스로 '할리 데이비드슨'을 “자유롭고 바람을 즐길 수 있는 영혼의 동반자”라 말할 정도다. 10년째 여성 라이더 그룹인 ’라이더스 아프로디테‘의 회장을 맡고 있다. '할리 데이비드슨 로드마스터'를 타고 선두에서 라이더를 이끄는 그녀를 다들 남자로 오해할 때도 있다.

“근간엔 거의 못 탔어요. 큰 경기를 앞두고 있을 때나 팀이 자리 잡지 못했는데 '다치면 어쩌느냐' 등등 주변 사람의 걱정도 많았어요. 2012년 결혼할 때 약속하길 '한 달에 한 번 라이더 그룹 정규모임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참가해서 라이딩을 할 것'이였는데, 결국 C.R.S 팀 훈련과 경기 일정으로 참가를 거의 못 했어요.”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선수들을 지도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모터사이클 라이딩이라는 특별한 취미를 즐기는 박성원 감독은 취미 생활도 역시 '선수가 먼저'다.

박성원 감독, 권명화, 이창하, 이지현, 이보은 전 국가대표 선수와 김서영 현 국가대표 선수.
1980년대부터 19990년, 2000년대 한국 수영계를 이끌었던 영광스러운 전 국가대표와 현재 국가대표의 만남이 제99회 전국체전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사진제공: 박성원)

받았던 인정과 존경만큼 시기와 질투도 많이 받았던 ‘첫 여성 국가대표 감독‘

2016년 리우올림픽을 마무리하고 그녀는 국가대표 사령탑에서 내려왔다. ‘Creative Real Swimming (C.R.S) Team’이라는 수영클럽을 창단했다. 실업팀이나 대학의 지도자가 되는 길도 가능했을 텐데 개인 클럽 창단을 선택한 것이다.

“국내 누구와 견주어도 제 경력은 떨어지지 않지만, 지방색도 강하고 여자인 제가 잘 나가는 것을 바라는 지도자들이 없었습니다.”

2019년 7월엔 박성원 감독의 홈그라운드인 광주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는 여러모로 많은 실망만 안겨주었다. 스폰서의 문제로 선수들의 유니폼에 매직으로 ‘KOREA’를 그려 넣어야 했다.

“외국 경기 경험이 가장 많은 사람은 저일 겁니다. 그렇지만 그 누구 하나 제게 대회 진행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 없더라고요. 광주에서 열리는 대회이지만 오랜 시간 전라남도 대표 선수로 전국체전에 출전했던 광주 출신인 제가 철저하게 배척당했습니다. 우리 팀 출신 선수가 출전했지만 필요 없는 오해를 살까 봐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어요.”

Creative Real Swimming (C.R.S.) Team 로고 (제공: C.R.S. 팀)

◆ Creative Real Swimming Team: 박성원 감독이 새로운 꿈을 꾸는 클럽

C.R.S. 팀의 코치진에는 박병훈, 한규철, 남동호, 장인성, 이인수, 이주형, 이환재 코치 등 전 국가대표 및 전 국가대표 코치 경력을 가진 이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 시작할 때는 코치진의 나이 차나 개성이 너무나 달라서 힘들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지금의 탄탄한 구조를 갖추게 되었고, 지금은 다양한 코치진과 각각의 다른 스타일이 공존하는 것이 팀의 특장점이다.

지금은 박병훈, 한규철, 남동호 코치가 잠실학생수영장과 한국체대 수영장에서 엘리트 선수(체육특기생)와 중, 고교 일반 선수를, 장인성, 이주형, 이환재 코치는 외국인학교에서 엘리트 선수와 초교 선수 및 마스터즈 선수를, 그리고 이인수 코치가 잠실1수영장에서 엘리트 선수 및 초, 중학교 선수와 마스터즈 선수를 지도하고 있다.

모든 코치진이 선수들의 장단점, 개선해야 할 점들, 부모님들의 니즈 또는 집, 학교와의 거리 등을 반영해 가장 최적화된 수영장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학업을 병행하는 선수들이 많기에 그 부분을 가장 많이 고려한다. 그 결과는 2019년 10월 개최되었던 제100회 전국체전에서 성과로 나타났다. C.R.S. 팀 선수들은 금메달 12개와 은메달 4개, 동메달 7개를 획득하는 기염을 토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당시. 박성원 감독은 한국 수영 (경영) 역사상 여성 최초의 올림픽 감독으로 수영 대표팀을 이끌었다. (사진제공: 박성원)

 

2016년 리우 올림픽 출전 당시. 왼쪽부터 박성원 감독, 박태환 선수, 안세현 선수. (사진제공: 박성원)

예전처럼 태극기만 바라보며 올림픽 나가는 선수 없어

한국 경영은 2019 광주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 남자 14명, 여자 15명, 총 29명의 선수를 출전시켰지만, 김서영 선수 혼자 개인혼영 200m에서 6위를 한 게 최고 성적이었다. 메달획득에는 실패한 것이다. 현 대한수영연맹의 국가대표 제도에 대해 박성원 감독은 목소리를 높였다.

“자력으로 올림픽 A 기준 기록 진출이 아니면 사실상 올림픽 출전은 못 합니다. B 기준 기록 통과해놓고 ‘기다리면 초청 오겠지’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국제수영연맹(FINA)은 ‘올림픽자격기록(Olympic Qualifying Time·QQT)’과 ‘FINA/올림픽선발기록’(Olympic Selection Time·OST)을 허용해 A·B 기준기록을 나누어 종목별로 출전국가가 최대 두 명까지 선수를 출전시킬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기준기록을 둔 것은 올림픽 경기를 위한 선수 정원을 추리기 위한 것으로, 세계신기록 및 아시아신기록에 기반을 둬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끝난 다음으로 규정이 바뀌어 2012년 런던올림픽부터는 한 종목에 최대 두 명의 선수가 출전하려면 두 선수 모두 상위 기준인 A 기록을 넘어야 한다. A 기준보다 하위인 B 기록을 넘는 선수가 아무리 많아도 A 기록을 통과하는 선수가 없다면 그 종목에는 단 한 명만 내보낼 수 있다. 또한, 출전 국가에 해당 종목의 B 기록을 넘는 선수가 없으면 선수를 출전시킬 수 없다.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경영은 개인종목 및 단체종목 등 35개의 종목이 열리며, 878명의 선수가 출전할 수 있다. 출전 선수는 2020년 3월 1일에서 6월 29일 사이에 국제수영연맹이 공인하는 대회에 출전해 대회 공인 기록을 근거로 올림픽 출전권을 받게 된다.

A 기준기록을 세운 선수는 자동 출전권을 얻으며, B 기준을 세운 선수는 878명의 정원 한도 내에서 6월 29일을 기준으로 국제수영연맹 랭킹 순으로 출전권을 얻게 된다.

"가슴에 태극기를 달았다는 국가대표로서의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선수는 이제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전국체전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경기마다 신기록이 수립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아직 많은 선수에겐 메달 획득보다는 4년 마다 개최되기에 출전의 의미가 더 큰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이 7~8월에 개최되는데, 소속팀의 연금, 상금 등이 걸려있는 전국체전이 매년 10월에 있다 보니 국제대회에 출전한다고 하더라도 자긍심 넘치게 임하는 선수들이 줄어드는 게 사실입니다."

전국체전 결과가 소속된 팀과의 계약이나 연봉책정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가 국가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 전국체전 대표가 되는 현실인 것이다.

2017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세계선수권 대회 당시 김서영 선수와 함께. 박성원 감독은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김서영 선수의 메달 획득을 예상한다. (사진제공: 박성원)

2020년 도쿄 올림픽, 1개의 메달과 2명의 결승 진출을 점친다

2020년 도쿄 올림픽 수영 출전선수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박성원 감독은 현재 올림픽 기준 기록을 놓고 본다면 한 자리 숫자의 선수만 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비관적 예측을 내놓았다.

“단체 종목 출전권을 딴다고 해도, 그 선수들이 모두 B 기준 기록 안에 못 들어가면 올림픽 출전 자체가 안 됩니다.”

대중들의 관심이 김서영, 안세현 선수에게 집중 되는 가운데 한국신기록을 세운 정유인, 정소은 선수도 유망주로 떠오르고 있다. 2016년 리우 올림픽의 감독으로서 박성원 감독은 이미 남자 평영, 여자 개인혼영은 안정권이고, 남자개인혼영, 남자접영은 더 노력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특히 후배이자 제자들인 국가대표 선수들이 이번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분발해주길 바랐다.

"소박하게 1개의 메달과 2명의 결승 진출을 꿈꿔봅니다."

2019년 김천에서 실시된 수영 꿈나무선수 하계합숙훈련 마지막 날 경영 선수들과 아티스틱스위밍 코치 선생님들이 함께 만든 하트. (사진제공: 박성원)

박성원 감독의 다음 꿈은 ‘수영학교’ 설립

박성원 감독은 좋은 선수와 지도자를 배출하기 위해 체육중, 체육고의 형태는 아니면서도 수영의 기초와 기본을 다지고 일반 학과공부도 가능한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꿈이다. 일단 전국에 C.R.S. 팀 전용 수영장을 만들고, 지금보다 3배 이상의 선수들을 키워 C.R.S. 팀 코치진이 독립적으로 선수들을 지도할 수 있게 돕고 싶다.

성격상 사업도 잘할 것 같았다는 박성원 감독. 그동안 ‘여자라서, 여자니까’라는 소리보다 ‘남자’, ‘형님’ 같다는 소리를 더 많이 듣고 살아왔다. 그런 박성원 감독이 듣고 싶은 말과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한국 수영계에 박성원이라는 좋은 지도자가 있었어. 모든 일에 도리를 지켰고, 선생님 말씀은 틀린 게 없었고, 내 선수에게는 최고인 선생님이었어….’라고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수영을 사랑하시는 많은 사람들이 수영을 응원하고, 수영선수들이 한목소리로 다 함께 수영을 위해서 힘써줬으면 좋겠습니다.”

2017년도 대한체육협회장실 방문 당시. (사진제공: 박성원)

국가대표는 결국 ‘자부심’, 수영은 ‘내 인생 전부 바친 모든 것’

국가대표 선수로서 7년 11개월을 태릉선수촌에서 보냈고, 국가대표 코치와 감독으로 8년 10개월을 태릉선수촌과 진천선수촌에서 보냈다. 현재는 국가대표 꿈나무 전임 지도자로 아직도 ‘국가대표’로 활동 중인 박성원 감독. 그녀에게 국가대표란 어떤 의미일까?

“선수일 때는 1등을 지키며 모든 국제대회에 참가해야 했던, 언제나 지기 싫고 자랑스러운 사람이었지만, 지도자가 된 다음부턴 국가대표 선수로서 긍지가 선수들에게 부족해 보여 많이 힘들었어요. 저에겐 ‘국가대표’라는 호칭에 자부심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국가대표’에 대한 추억은 선수촌에 있네요.”

열 살에 수영을 시작해 오십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수영은 어떤 의미일까?

“수영을 떨궈보려, 안 해보려 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결국 다시 수영장으로 돌아왔어요. 다른 일도 해봤지만, 흥미가 없었어요. 이미 너무 깊숙이 발을 들였고, 다른 걸 시작하기에는 제 안에 있는 노하우가 아까워 후배들에게 모든 것을 전수 중입니다. 수영은 제 인생을 전부 바친 모든 것이고, 저 자신이 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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