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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잔(24)]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84』

- 빅 브러더가 아니라 브러더를 위한 세상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3.11.13 16:39 의견 0

조지 오웰의 국적은 영국이나, 인도제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주장한 작가이다. 본 작품 『1984』는 1949년에 나온 작품인데, 읽어 본 독자는 알겠지만 현시점에서 봐도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다.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그린다고 할 때, 작가의 작품이 항상 모티브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보다 앞선 작품 『동물 농장』(1945)은 대놓고 소비에트연방을 비판한 책이데, 작가의 정치적 식견과 세계를 이해하는 탁월한 안목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윈스턴 스미스가 등장한다. 그는 당을 추종하는 척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당을 의심하고 전복을 꿈꾼다. 세계는 거대한 삼개국으로 나눠져 있고, 서로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현상 유지를 추구한다. 더 큰 영토를 얻기 위해 전쟁을 치르는 게 아니라 기존 영토와 인구를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쟁이 사용된다.

텔레스크린을 통해 ‘빅 브러더’가 듣고, 보고, 판단하고 있지만 ‘빅 브러더’의 실존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설령 빅 브러더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사각지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서나 그들을 감시하는 눈이 있어서 사실상 개인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골드스타인이라는 체제 전복 비밀 조직의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지하운동이 퍼지고 있다는 소문이 떠돈다. 이 역시 명확한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사상 불순자를 색출하기 위한 밑그림으로 이해된다.

윈스턴은 자신과 생각이 같은 줄리아를 만나 지하 조직에서 활동하고자 한다. 그러다 만난 오브라이언의 덫에 걸려 모진 고문을 당한다. 서로 사랑을 고백했던 연인은 모진 고문에 당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하고 스스로 세뇌돼 다시 풀려나지만, 윈스턴은 예정대로 당에 의해 암살된다.

◆‘빅 브러더’가 실재하는 세상

우리 세상에는 실제로 ‘빅 브러더’가 존재한다. 우리의 정보가 빠져나가는 수준을 보면, 그렇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물론, 자유 민주주의 질서를 옹호하는 대한민국은 대놓고 빅 브러더를 운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 빅 브러더가 누군가의 손에서 운용되고, 많은 국민이 통제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다만, 모든 사람이 빅 브러더가 하는 말을 믿는 것은 아니다. 빅 브러더를 비판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전체주의가 아니다. 빅 브러더가 있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는 침해받고, 정보가 유출돼 곤혹을 치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방패로 그 영향력을 줄일 수 있다.

조금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빅 브러더는 ‘빅 데이터’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이 만들어 낸 알고리즘으로 우리의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분석된다. 그러나 분석된 자료는 객관적인 게 아니라 알고리즘을 만들어 낸 사람의 주관적 산물이다.

이렇게 보면, 빅 브러더는 빅 데이터 분석에 방향을 제시한 사람들의 편견이라고 할 것이다. 인종차별, 남녀차별, 지역차별, 계급갈등, 세대갈등 등 모든 게 편견의 원인이다. 이런 원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빅 브러더는 다른 말로 상부계층의 편견이기도 하다.

◆과거, 현재, 미래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본문 중)

이 문장은 조지 오웰의 역사에 대한 탁견을 보여주는 말이다.

우리는 역사를 팩트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누가 기록했고, 누가 해석했느냐에 따라서 역사는 달라진다. 문장은 과거가 미래를, 현재가 과거를 지배한다고 말한다. 즉, 과거든 미래든 현재를 지배하는 자의 것이 된다는 의미다.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다. 과거가 중요한 이유는 계획(미래)을 세우는 데 필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는 언제라도 현재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고, 미래 계획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 구상하는 것이니, 과거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좌우하게 된다. 이로 인해 역사는 현재의 필요로 인해서 언제라도 짜깁기가 가능해진다. 아울러 현대인은 역사에 점점 무감각해져 간다.

권력은 과거에 연연하지 말라고 전한다. 그러면서 오직 미래를 보라고 말한다. 과거의 오점을 굳이 건드려서 뭣 한단 말인가? 한일관계의 어려움은 과거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양국의 밝은 미래를 그리기 위해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자고 제안한다. “현재에 그렇게 합의하면 될 거 아니냐?”라는 게 지금 정부의 생각이다.

『1984』의 빅 브러더가 떠오른다. 물론, 전체주의가 아닌 대한민국은 그런 빅 브러더의 편견에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의 말대로 현재 권력자가 최고다. 아무리 비판하고, 무능력하다고 손가락질해도 권력에 기생하는 자는 어느 시대나 있었으니까.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각 단어는 모순 관계다. 전쟁이 평화가 될 수 없고, 자유는 예속이 아니다. 무지는 종종 힘이 되긴 하나,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의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을 고려하면, 이 또한 모순이다. 작품 속 이 언어들의 조합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이 말이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 사고 체계가 이상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런 이중사고, 혹은 지록위마(指鹿爲馬) 같은 말을 곧이곧대로 듣기만 하는 곳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작품은 전쟁을 통해 평화로운 통제가 가능한 세상을 말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바로 그런 것 아닐까? 푸틴은 전쟁을 통해서 러시아 내의 평화를 원했던 게 분명하다. 자유는 어떻게 예속이 될 수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국가 싱가포르는 독재 국가이다. 언론의 자유가 없다. 경제적 부가 자유 침탈을 받아들인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선언하고 전파하면 그들은 바로 예속된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자유 주장은 곧 결박이다. 그러니 예속이 맞다.

현재 대통령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자유다. 그러나 자유로운 해석은 받아들이지 않고 제재를 가한다. 마지막으로 무지는 힘이다. 알지 못한다는 말은 곧 세뇌가 쉽다는 의미다. 작품 속에서 자녀들이 부모를 고발하는 일이 등장한다. 그들은 부모보다 당을 우선시하는 게 옳다고 배웠고 세뇌됐기 때문이다. 북한을 떠올리면 아주 쉽게 이해된다.

대한민국도 유사하다. 정치학 교과서는 모든 국민, 유권자를 합리적인 인간으로 규정하고 텍스트를 써 나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다. 정치 제도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유권자가 더 많다. 자극적인 선동에 쉽게 넘어가는 국민이 더 많다. 그리고 이러한 무지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서 뜻밖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사이비 교주, 허경영 등.

◆브러더가 필요하다

브러더는 동지라고 해석할 수 있다. 동지는 평등을 의미한다. 차별이 없다. 그러나 동지 앞에 ‘빅’등의 접두사가 붙어버리면, 동지는 아래 사람을 뜻한다. 우리 사회는 ‘빅’을 추종한다. 그래서 아무리 대통령이 잘못해도 30%이상은 무조건 지지한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다. 말로는 평등을 주장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빅’을 달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프랜스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많은 비판을 받는 명저인데, 나는 이 책에서 인간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기를 원하는 동물이라는 대목에 주목한다. 결론은 인간은 모두 성인(聖人)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본능을 충실히 따르는 게 당연하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도 『노예의 길』에서 같은 부분을 지적했다. 전체주의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인간의 본능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빅 브러더’는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브러더를 계속 언급해야 한다. 동물적 본성을 항상 억누를 필요는 없으나, 우리가 제도를 만들고 법과 질서를 세운 이유는 바로 동물적 본능을 누르고 평등을 지향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머릿속에 새겨야 한다.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빅’을 의식의 지우개로 깨끗이 지우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물론, 이런 연습조차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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